부슬비가 조용히 내리는 제주의 수목은 그저 뿌예 보였다. 드높은 삼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너른 귤밭 속에 하얀 집이 폭 안겨 있다. 흐린 날씨인데도 건물의 단단한 형태와 새하얀 색만은 선명하다. “하얀 집이에요.” 이 단서 하나만으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 신성원·한솔비 씨 부부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이자 스테이로 운영하는 ‘과수원집 소원재’다. 부부의 주거 공간인 주택과 티룸, 숙소 두 채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곳은 본래 귤나무가 무성한 과수원이었다. 과실나무를 심어 가꾸는 밭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은 듯 이제는 열매가 아닌 잘 익은 인연의 과실을 주렁주렁 맺고 있지만 말이다.
젊은 부부의 제주 정착기
패션 회사 입사 동기인 부부는 백년가약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행을 꿈꾸었다. 더 정확하게는 아내 한솔비씨가 제주 이주 열풍이 불기 훨씬 전부터 간직해온 작은 바람이었다. “열아홉 살에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줄곧 제주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하고 남편에게 제 꿈을 이야기했더니 그이도 흔쾌히 받아들였죠.” 당시 부부는 잦은 야근으로 몸과 마음이 구두 뒤축처럼 닳아갔고, 이내 한계점에 다다랐다. “이런 생활 방식으로 젊은 시절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주를 결정한 이후 바람도 쐬고 현지 조사도 할 겸 달마다 제주를 드나들었다. 목적지는 따로 정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남원읍은 처음부터 후보지로 삼은 지역이었지만 여간해서 매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념하고 다른 지역을 알아보던 차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는데, “주위가 삼나무 천지니 볼 것도 없다”는 사족이 붙었다. 중개업자의 심드렁한 말에 굴하지 않고 보러 간 땅은 오히려 부부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사방이 삼나무로 둘러싸인 덕분에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기지처럼 독립적으로 분리되는 효과가 있었다. 삼나무의 비호 아래 울립한 푸른 귤밭, 그 너머로 흐르는 검푸른 한라산 능선. 부부는 절로 그 웅대한 풍경 속에 살포시 놓인 작고 하얀 집을 떠올렸다. 땅을 장만했으니 이제 집을 지어야 할 차례. 부부는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에이루트를 발견했다. 이 부부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온 젊은 이주민인 이창규·강정윤 씨 부부가 공동 운영하는 건축사 사무소였다. 예산을 묻는 사무적인 짧은 통화를 마치고 곧바로 에이루트 사무실에서 미팅을 했다. “들어가자마자 제가 좋아하는 덴마크 건축가 예른 웃손Jørn Utzon의 조명이 있더군요. 서로 취향이 잘 맞겠다고 짐작했어요.” 물건을 유심히 관찰하는 디자이너의 습관이 파트너를 알아볼 때도 빛을 발했다.
제주도에서 집 짓기란
이창규 소장은 건축주가 땅을 샀을 때 처음 상상한 집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설계 콘셉트는 ‘과수원 속 하얀 집’에서 출발했다. 스스로 잘난 체 돋보이기보다 고요한 나무의 배경이 되는 집. 부부의 요구 사항인 주택, 티룸, 숙소 두 채는 한 덩어리로 합치기보다 각 공간이 기능적으로 분리되도록 귤밭에 넓게 나누어 배치하고, 각 건물은 주변의 삼나무보다 낮고, 단정한 조형으로 구상했다. 7평 남짓한 숙소 두 채 중 앞집은 한옥을, 뒷집은 작은 오두막을 모티프로 디자인했다.
네 사람은 바닥재의 종류와 크기, 컬러, 미세한 톤 하나까지도 다 같이 모여 다수결로 정했다. 각기 의견이 다른 난감한 상황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더 심각한 난관은 아이러니하게도 경탄해 마지않던 제주도 자체에 있었다. 우선 기후가 일관되지 않아 봄에는 고사리 장마, 여름부터 늦가을까지는 잦은 태풍과 폭우로 인해 가능한 공사 일수가 절대적으로 적었고, 자재와 인력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공사 기간은 점차 길어져 결국 1년 2개월 만에 완공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부부의 관심 또한 집 안 구석구석까지 배어들 수 있었다.
과수원집 소원재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생각보다 꽃이 많이 피고 또 많이 졌어요.” 티룸 앞에 멋부린 태가 나지 않는 수수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신성원 씨는 어느 수목장 깊은 구석에서 발견한 이 나무를 자연스럽게 솟은 둔덕 위에 심기 위해 직접 삽을 들고 흙을 고르고 다졌다. 그 세심한 정성은 티룸에 자리한 가구에도 가닿는다. 테이블과 의자는 권원덕 목공예 작가, 아일랜드 상판은 젊은 옻칠 장인 유남권 작가와 협업해 만든 것이다. “테이블은 만졌을 때 오크의 질감이 전해졌으면 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차를 마시는 절제된 느낌을 의자의 형태감에 부여하고 싶었죠.”
무엇보다 공간에 방점을 찍는 것은 조명이다. 6개월 동안 찾아다니며 고심해서 고른 조명등은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1998년 작품 글로볼Glo-ball 펜던트다. “손님들은 마치 달이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심 뿌듯한 눈치다. 마침 주방 냉장고에 붙어 있는 엽서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좋은 기운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앞집 숙박객 드림.” 손님이 건넨 감사의 말 한마디에 고생한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라고 한다. “처음엔 부족한 점만 눈에 들어왔지만, 날로 애정이 깊어져요.” 신형철 문학 평론가가 “저자는 자기 책의 단점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사람이고 장점을 알게 되는 마지막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글 쓰는 일도 이럴진대 집짓는 일이야 말해 무엇할까. 초반에 부슬대던 빗줄기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에 굵은 장대비로 변했다. “이 집에 살면서 비 오는 날이 좋아졌어요.” 차분한 공기 속에 빗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부부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있음을 안다. 충분히 그 속에 머무르다 놓아준다. 과수원집 소원재의 시간은 그렇게 유유히 흘러간다.
출처 : 행복이 가득한 집 (http://happy.design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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